날마다솟는샘물 예수님의 우선순위 성경 큐티 주석 2020년 4월 1일

2020. 4. 1. 15:06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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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솟는 샘물

예수님의 우선순위

요한복음 11:1~16

 

 

무디 성경 주석:

 

11장의 사건은 수전절(12월)과 십자가 처형(4월) 사이의 어느 때에 일어난다. 예수님은 그동안 다른 사람들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기는 했지만(과부의 아들, 눅7:11-17; 야이로의 딸, 마 9:18, 23-25),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 전에 마지막으로 행하신 가장 극적인 표적(기적)이 되었다.

 

 

11:1-2

이곳의 나사로를 누가복음 16:19-26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혼동하면 안 된다. 이 나사로는 요한복음에만 언급된다. 베다니[1:28의 베다니가 아니다]는 예수살렘 동쪽으로 3.2킬로미터 떨어져 있었으며(18절), 감람산 부근에 있었다.(막 11:1). 2절의 삽입구적인 말은 12:1-8을 예상하도록 한다. 아니면 독자들이 초기의 기독교적 가르침을 통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던 마리아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가정한 것이다(예를 들어, 막 14:3-9; 참고. 눅 10:38-42).

 

 

11:3-4

누이들은 나사로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자기 오라버니의 병을 알렸다. 누가 그 전갈을 해주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대답하셨다(4절). 대신 그 상황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었다(참고. 9:3).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은 이 기적적인 치유에서 영광만 받게 되지는 않으실 것이다(40절). 예수님은 또한 부분적으로는 나사로를 살리신 것(그로 인해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과대망상적 공포를 불러일으켰다)으로 인한 그분의 십자가 처형(참고. 11:47-53)에 의해서도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11:5-6

이 이야기에서는 나사로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강조된다(3, 5, 36절). 하지만 그의 누이들에 대한 사랑도 표현되어 있다. 특히 마르다가 두드러지는데, 아마 그녀가 맏이이기 때문에 혹은 그녀가 20절 이하에서 처음으로 말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6절), 의도적으로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신다. 그것은 분명 자비로움이 없는 것처럼 보였을 만한 반응이었다. 이것은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나사로는 예수님께 그가 병들었다는 말이 들렸을 때쯤에 죽었다(11, 14절).

 

 

11:7-8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전갈을 받은 지 이틀 후에(6절), 예수님은 유대 베다니로 다시 가기로 하셨다. 그곳은 베뢰아보다 더 위험한 지역이었다(10:40에 대한 주석을 보라). 예수님이 지체하신 이유는 나사로를 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다(14절). 그러나 이틀을 지체함으로 그 기적은 더욱더 부인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10:31, 39에 비추어볼 때 제자들의 반응은 인간적이며 현실적이었다. 그들은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8절)라고 말했다(참고. 5:18; 7:1, 19, 25, 30: 8:37, 40; 10:39). 그들은 왜 예수님이 다시 거기 가려하시는지 의아했다.

 

11:9-10

아버지의 뜻을 행할 만한 제한된 시간만 남아 있었다(참고. 9:4). 일은 낮의 12시간 동안 했다. 그리고 어두워지면 일을 중단했다. 하지만 아직 낮일 때 일을 그만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았다. 예수님이 사역했던 '낮'시간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이 때 이르게 일을 중단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나사로와 그의 가족에게 사역을 계속하기로 결심하시는 것이다. 10절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그분이 사역할 수 있는 시간이 다할 것이며 배신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실 '밤'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의미하시는 듯하다. 그때는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빛도 없이(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라는 말의 의미) 밤에 걸어 다니는 사람과 비슷한 큰 고통의 때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사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단언하심으로 자기 제자들을 위로하셨다. 하지만 그 일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고 재단언하셨다.

 

 

11:11-13

유대로 가는 것에는 잠재적 위험이 내포되어 있었다(8절). 우리 친구 나사로라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그 여정에 동행하려는 동기를 더 부여해주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나사로가 잠들었도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다(12절). '잠'은 구약에서 죽음을 나타내는 대단히 흔한 비유였다(왕상 2:10; 11:43; 단 12:2).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 지라(13절). 그리고 이것은 나사로가 회복될 것에 대한 좋은 징조였다.

 

11:14-16

제자들의 혼란으로 인해 즉각적인 대답이 필요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14-15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왜 기뻐하셨는가? 열한 제자는 이미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었다(2:11; 6:69). 이제 나사로가 죽었으므로, 주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고 그분이 "부활이요 생명"(25절)이라는 제자들의 믿음을 강화할 수 있으셨다. 신약에서 요한만 도마(16절)를 디두모라고도 하는 자('쌍둥이'라는 의미, 20:24; 21:2)라고 언급했으며, 그에게 중대한 역할을 부여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는 도마의 말은 궁극적으로 제자들과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죽어야 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롬 6:6, 8; 골 2:20; 딤후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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