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솟는샘물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른다 성경 주석 큐티 2020년 3월 27일

2020. 3. 27. 10:53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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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솟는샘물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른다

요한복음 10장 1절~10절

 

무디 성경 주석:

10장의 사건들은 9장의 사건이 있은 지 거의 석 달 후에 일어났지만(참고. 7:2, 37은 가을의 초막절과 관련되어 있다, 10:22에 나오는 수전절은 12월에 거행되었다), 요한은 그 두 장에 나오는 사건을 중단 없이 이어놓았다(참고. 10:21에 나오는 맹인에 대한 언급). 10장은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양과 그의 목자와 비교하는 확대된 비유이다.

 

 

10:1

바리새인들(참고. 9:40)은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지도자)들이다(참고. 겔 34:40)은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지도자)들이다(참고. 겔 34:1-10; 렘 23:1-4). 한 유대 가정에는 양 우리 하나에 서너 마리의 양 떼가 있었을 것이며, 단 하나의 통로를 지키기 위해 밤에 문지기를 세웠을 것이다. 목자는 자신의 양 떼를 데리고 나와 풀을 뜯기기 위해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갈 것이다. 절도범은 양을 훔치기 위해 살금살금 돌 벽을 넘어가야 했다.

 

 

10:2-3

구약에서 목자는 이상적인 자도자와 왕의 이미지였다. 하나님은 최고의 목자이셨으며(시 80:1; 사 40:10-11) 메시아는 왕이며, 목자였다(겔 34:23-24; 37:24; 렘 23:1-5; 마 2:6). 예수님은 목자로서 문으로 들어간다. 즉, 예수님은 합법적인 목자이며, 그분은 메시아 예언을 성취하신다. 신랑의 들러리가 신랑과 함께 서 있는 것처럼(3:29),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3절)라는 말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세례 요한의 역할을 묘사할 수도 있다(1:6-8). 하지만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문지기'라는 말에 어떤 상징적 의미도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양의 우리는 이스라엘을 나타낸다(참고. 16절). 양, 곧 이스라엘의 한 분 참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음성이 참된 메시아의 음성임을 인식한다(참고. 5:37-38, 46-47; 8:47)."인도하여 내느니라"라는 말은, 그 비유 내에서는 목자가 먹을 것과 물을 발견하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비유의 영적 측면에서, 그것은 예수님이 그분의 양을 위해 영적 양식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10:4-6

이스라엘에서 목자는 그들의 양을 몰아가기보다는 인도할 것이다(앞서 가면).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에만 반응했다. 그들은 타인의 음성은 따르지 않을 것이다(5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불리하게 설득시키려는 말을 맹인이 거부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셨다(6절).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눈멀음 때문에 알지 못했다(9:40-41).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참된 양이라고 생각했다.

 

 

10:7-8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알지 못했으므로(6절), 예수님은 비유적 표현을 약간 바꾸었다(7-10절). 1-6절에서 예수님은 목자였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라고 주장하셨다. 양 우리는 영생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양 우리로 들어갈 수 있는, 즉 영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수단('문')이다(9-10절; 14:6). 구약에는 참된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라는 말은 그 거짓 지도자들(바리새인들을 포함해서)과 자신들이 하나님께 가는 길이라고 주장한 메시아들을 말한다. 하나님의 양들 [참된 구약 신자들]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10:9-10

누구든지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모든 사람이 지닐 수 있다는 것을 확증한다. 구원을 받고라는 말은 절도와 야생동물로부터 보호받는 것을 의미하는 비유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영생을 묘사한다(참고. 10절). 들어가며 나오며 [양단 법]라는 말은 꼴을 얻으리라는 말과 함께, 평생 동안의 완전한 공급과 안전을 묘사한다(참고. 4:14; 6:35). 도둑과는 반대로 그리스도는 신자들이 지금과 내세 둘 다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온 것이다. 영생은 정적인 속성이 아니다. 일단 영생을 받고 나면, 순종을 통해 그것이 넉넉하게 될 수 있으며 그래서 풍성히 경험할 수 있다(참고. 벧후 1:11).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을 위해 오는 도둑은 보통 생각하듯이 사탄이 아니라,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당시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거짓 선생들이다(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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